나, 제이크 후레이크
《ㄴㅐ달팽이집 육년빌리지 김세현》
“나가냐?” 물으면, “들어오는 건데요.” 답하던 경상도 산업공단의 평범한 연립주택에서 스물 몇 해를 살았다. “정상가족”으로 장려된 허울 좋은 가부장 핵가족의 실패를 딛고, 민주적 자치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욕망하는 나, 제이크 후레이크의 민원 추진현황을 나눈다. |
□ 추진경과
- '17.2.19. 작성 요청: 김솔아 민쿱 상근활동가
- '17.2.20. 1차 작성 독촉: 구두 기고 합의 결렬
- '17.2.22. 2차 작성 독촉: 김세현 잠수
- '17. 3. 6. 탈고 및 제출
□ 주요내용
가. "내 방은 돼지우리다. 고로 나는 돼지다."
나. "잠꾸러기 선임은 알람을 맞추려무나."
다. "유흥가 고시원에는 고시생이 없었다."
라. "우주를 줄게. 달팽이집 다오."
□ 세부내용
가. "내 방은 돼지우리다. 고로 나는 돼지다." |
4년제 학부를 5학년으로 다니게 된 2011년이었다. (대학교임.)
원룸에 살던 나는 기숙사에서 인터넷 사용시간을 제한한다는 제보를 받았다. (대학교임.)
그곳에는 밤마다 복도에 일렬로 서서 층장이 호명하면 대답하는 점호제도가 있었다.
점호 중에 짝다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다가 층장으로부터 주의를 받는 일도 일상이었다.
학기 초에는 불시점호도 행해졌다. 비인가 전열기구 반입과 위생상태 점검을 명분으로 방을 들쑤시고 벌점을 부여했다. 몇 해 전까지는 단체기합(얼차려)도 주어졌다.
“내 방은 돼지우리다. 고로 나는 돼지다.”
2007년, 위생상태 불량으로 벌점을 부여받는 동시에 군대식 얼차려(오리걸음)를 당하며 사생들이 복명복창한 구호다. 흡사 지네와 같이, 엎드려서 발을 뒷사람 어깨에 걸치는 한강철교 얼차려도 주어졌다. 진정 얼이 빠진 게 어느 쪽이란 말인가. 임대인이 내 방 위생 상태에 관심 없음이 차라리 안심이었다.
외박을 하려면 조교에게 육하원칙에 의거 간곡하게 작성한 외박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아름답고 너그러운 조교님” 따위의 수사가 자의적인 판단을 뚫는 치트키의 용례였다. 사실상 외박이 허가제로 운영된 셈인데, 이를 문제제기하자 이듬해부터 신청제로 전환하였으나, 부모님 휴대전화 문자로 외박 계획이 통보되었다. 대학생의 자기결정권과 내밀한 사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제한하는 조치였다.
생활관장 이하 기숙사 행정실은 그렇다 쳐도, 엄연히 사생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구인 자치회는 왜 앞잡이 짓이나 하는지 궁금했다.
자치회는 학군단 세력이 대물림해왔고, 그 해 종합감사 결과 F등급을 받았다.
온라인을 통해 몇몇 사람들과 접촉해서 자치회에 방문했다. 인터넷 사용시간 제한과 코인세탁기 도입의 찬반을 묻는 설문조사 실시를 요청했다.
약속 이행이 답보되던 차에 학교게시판에 올린 글을 당장 삭제하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문제의식 있는 교수, 문제제기 했던 졸업생, 인권침해를 호소하는 당사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 기숙사 규칙 개정 운동 (연서명) ○ 자치회 민주화 (부적절 후보 낙선운동, 층장 임의선발 불복종) ○ 사생의 인권감수성 제고 (대학신문 기고) ○ 주변 대학 실태조사 및 자료집 발간 |
2011년 5월부터 2012년 4월까지, 협박과 회유를 조롱하며 일 년을 싸웠다.
그리고 스물여섯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그 무렵, 민달팽이유니온은 설립 반대에 부딪힌 기숙사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나. "잠꾸러기 선임은 알람을 맞추려무나." |
훈련병이 되고 겪은 첫 충격은 대학기숙사와 병영생활관의 구조와 운영규범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나듦을 감시하는 출입구에 조교실 대신 당직실이 있었다. 그곳에선 전파사항을 일방적으로 방송했다. 호실별 사진을 포함한 명단을 문 앞에 붙이고 관리했다. 다용도실 등 시설의 열악함에서 비롯된 문제들은 사생의 인격으로 개체화하여 귀인(歸因)했다. 규율권력은 어용 자치회와 상벌점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작동됐다. 병영생활규칙과 이에 근거한 점호 등 반인권적 제도를 접할 때마다 기시감에 아찔했다. 대학기숙사는 영락없이 병영생활관의 모조품(시뮬라크르)이었다.
제법 높은 편제에 소위 “땡보”인 업무지원병으로 배속됐다. 그런데도 적폐가 고약했다. 집합과 내리갈굼, 병사 상호 간 명령, 암기강요, 전화대기, 기상보조 등 어느 종갓집 제사처럼 위계적이고 허례허식 투성이었다. 그러나 병영생활관에서의 문제는 오히려 개선의 의지와 방향이 보였다.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병영생활 행동강령」이 그 근거였다.
첫째, 분대장을 제외한 병 상호간에는 명령이나 지시, 간섭을 금지한다.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구타, 가혹행위 및 집단 따돌림을 금지한다. 셋째, 폭언, 욕설, 인격모독 등 일체의 언어폭력을 금지한다. 넷째, 언어적, 신체적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 성 관련 법규 위반행위를 금지한다. ※ 국방부 명령, 「병영생활 행동강령」 |
제도적 금지를 문화적 금지로 가져와 작동하는 것이 스스로 부여한 소임이 되었다. 편안함을 포기하고 선임병과 간부들이 바라는 모습을 항상 초과 달성했다. 신임을 얻고 모범병사에 이어서 병사자치회의 생활관장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생활관원에게 정당한 명령과 지시를 부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선임병일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임병이 잠꾸러기 선임병을 깨워주는 아름다운 문화는 그렇게 숨을 거뒀다.
다. "유흥가 고시원에는 고시생이 없었다." |
나고 자란 가정, 지성의 상아탑 그리고 군대에서조차 진정한 민주적 자치는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이들 세 공동생활은 감시와 처벌의 규율권력으로 다스려진다는 한계를 상수로 지녔다. 전역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한 해를 보내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상경했다. 2015년 3월이었다. 그토록 푸짐하게 차린 보증금은 없었기에 월 38만 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청년주거빈곤의 당사자가 되었다. 고시원은 이상의 공동생활과 근원적인 작동원리를 달리했다. 문화사회학 수업에서 접한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고시원 생활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악의 평범성을 만났다.
그 고시원에는 고용된 총무가 없었다. 주인도 생활에 별달리 관여하지 않았다. 팔굽혀펴기가 불가능한, 연동운동 소리마저 옆방 사람과 공유하는, 최순실의 독방보다 열악한 공간에 사람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형벌이었다. 사회심리학 수업에서 접한 “스탠포드 감옥실험”이 떠올랐다. 간수와 죄수라는 역할만 부여하고 피험자의 이상행동에 무심했던 실험자 필립 짐바르도는 바로 헬조선의 고시원 주인이었다.
고시원 사람들은 좁은 복도에서 남루한 모습으로 마주치길 극도로 꺼렸다. 무한정 제공되는 밥과 김치를 꺼내려 부엌에 드나들 때에도, “제발 아무도 없어라.” 주문을 외웠다. 정확히는 내가 그랬고, 남들도 그럴 것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고시원에는 “모래 뺏기” 게임이 있었다. 가운데 깃발이 꽂힌 모래더미를 차례로 덜어내다가 깃발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패배하는 그 게임 말이다. 밥솥에 해둔 밥을 마지막으로 쓰러뜨리는 사람은 새 밥을 지어놔야 했다. 하지만 딱딱하게 눌러 붙은 밥풀을 박박 문질러 떼어내고 새 밥을 짓는 기여행동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었다. 설거지와 새 밥 앉히기는 간절한 자가 하기 마련이었다. 새 밥이 지어지고 뜨거운 김을 내뿜을 때면, 고독사라도 하신 줄 알았던 사람들이 낌새를 차리고 인기척을 냈다. 가장 무서운 형벌은 좁은 공간이나 벽간소음이 아니라,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술에 취해 욕설을 되뇌던 옆방 아저씨를 죽이고 싶었을 무렵, 그곳을 떠났다.
라. "우주를 줄게. 달팽이집 다오." |
최저임금이나마 받을 수 있게 되자, 가장 먼저 고시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최소한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곳에서 관계를 맺고 싶었다. 한 사회적기업에서 운영하는 공유주택에 월 소득의 4할을 부담하며 살기로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자치의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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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3호집 102호에 빛이 있으라> | <담배와 쓰레기로 문전성시를 이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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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에서 강북으로 북진하던 날> |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내 집 앞 쓸기> |
비슷한 연령의 홈메이트들은 밤마다 맥주를 기울이고 연주를 했다. 부지런한 구성원들은 기여행동(고생)을 사서 했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현물을 곁들이기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작은 갈등들도 있었으나, 다수의 긍정적인 기운이 압도했다. 업체는 서비스를 제공하되, 자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집주인과 업체의 전세 재계약이 불발되었다. 이런 공동체가 장기적으로 또, 주변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되는 모델이 필요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민달팽이유니온 주거상담사 교육과정 3기를 수강 중이었다. 성북에서 공급될 3호집 리모델링에 참여하며, 입주할 마음을 굳혔다.
지나서 보니, 3호집의 입주조합원이 되는 포부는, 앞선 지난한 과정 탓에 무척 과잉됐었다. 성북에서 집사람들과 힘을 모으고, 갈등을 중재하고, 때론 갈등의 한가운데 휘말리며 많은 배움을 얻었다. 이 자리를 빌려, 함께 버티고 살아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성북에서 1년 하고도 몇 달을 더 살고, 강북으로 북진했다. 사실 이 강북 LH 달팽이집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시작한 글이다. 우리집은 수유역과 쌍문역 사이, 강북 수유2동에 위치했다. 민간에서 지은 원룸 건물을 LH한국토지공사에서 매입해서 임대주택으로 공급한 매입형 공공임대주택이다. 특이한 점은, 민간 사회주택 주체들이 운영기관으로 들어온 것이다.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 강북 수유와 부천 송내 두 곳에서 이 새로운 시도에 함께했다. 국가의 공적자금으로 공급된 만큼, 주거비는 한층 저렴하다. LH의 까다로운 입주기준과 보증금의 하한선이 있지만, 그런 기준과 절차를 감내할 값어치를 한다. 3호집에서 거실을 공유하던 창현님과 함께 둥지를 옮겼다.
구조도 특이하다. 총 7세대가 투룸형 1인실, 원룸형 2인실, 투룸형 1인실+2인실로 나뉘어있다. 식구와 이웃 사이 애매한 관계성은 협동조합이 이어준다. 1월 전후로 입주하며, 자잘한 하자는 LH 관리소에 접수해서 처리했다. 새집이라, 세대별로 도시가스도 신청해서 설치했다. 세탁기, 냉장고, 식탁은 주택협동조합이 한 번에 값을 치르고 입주조합원이 매달 리스비용을 납부하기로 했다. 인터넷과 텔레비전 서비스도 최대한 모두를 배려하며 가입했다. 앞으로, 남는 주차장을 월주차로 돌릴 계획이다. 날이 풀리면 전망이 좋은 옥상도 꾸미고 사람들을 초대할 요량이다.
나, 제이크 후레이크의 느린 발걸음은 민달팽이를 만난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거친 거처를 톺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사람들의 일상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지나온 경로도 궁금하다. 민달팽이가 그래왔듯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월간민달팽이] > * 월간민달팽이 회원 조합원 기고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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